양극성스펙트럼장애란?

정신과 외래를 찾는 많은 환자들이 “우울증” 진단을 받고 항우울제를 복용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밤새워 일하고도 피곤한 줄 모른 채 말이 빨라지고, 소비가 늘고, 잠이 확 줄어버리는 시기를 겪는 경우가 있다. 혹은 항우울제를 시작하자마자 기분이 과하게 들뜨는 ‘스위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통적인 양극성장애 1형(일주일 이상 지속되는 조증)이나 2형(4일 이상 경조증 + 주요우울삽화)에는 꼭 들어맞지 않지만, 분명 “같은 계열”에 있는 듯한 이 환자들을 설명하기 위해 학계가 꺼내든 개념이 ‘양극성 스펙트럼(bipolar spectrum)’이다.

양극성 스펙트럼이라는 틀은 1970년대 미국의 정신과 의사 하곱 아키스칼(Hagop Akiskal) 교수가 “조울병과 주요우울장애는 끊어져 있는 두 섬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선”이라고 지적하면서 시작됐다. 아키스칼은 특히 ‘순환성 기질(cyclothymic temperament)’이나 ‘소프트(spectrum) 양극성’이라 불리던 기분 변동형 우울증 환자들이 기존 분류 밖에 방치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연구가 쌓이면서 짧은 경조증(2~3일)의 반복, 약물 유발 조증, 경미하지만 만성적인 순환기분장애, 가족력이 강한 반복성 우울장애 등이 모두 같은 스펙트럼 위에 놓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왜 굳이 스펙트럼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했을까. 첫째, “우울증만 반복된다”는 표면적 증상에 갇힌 채 항우울제만 늘려 쓰면 조증-경조증이 은밀히 악화돼 예후가 나빠진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둘째, 기분 안정제·비정형 항정신병제·심리사회적 중재가 병용돼야 할 환자들을 조기에 가려내 맞춤 치료를 제공하려는 임상적 필요성 때문이다. 실제로 양극성 스펙트럼 환자는 항우울제 단독요법에 취약해 조증 전환이나 혼재 상태(mixed features) 위험이 크다.

스펙트럼의 폭은 생각보다 넓다. 축으로 잡으면 맨 한쪽 끝에는 전형적 BD-I, 그다음 BD-II가 자리한다. 그 옆으로는 2~3일짜리 경조증과 경미한 우울이 섞여 있는 ‘기타 명시된 양극-관련 장애’, 다시 그 옆으로는 2년 이상 만성적으로 기분이 들쭉날쭉한 순환기분장애가 이어진다. 또 항우울제나 스테로이드, 갑상선 호르몬 등으로 촉발된 조증-경조증, 산후(産後) 또는 계절 변화와 맞물려 나타나는 반복성 우울 삽화도 스펙트럼에 포함된다.

이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첫째, 기분이 짧게 솟구치는 동안 잠이 확 줄고 말수가 늘어나며, 지갑이 가벼워질 정도로 충동구매를 반복한다. 둘째, 우울과 불안, 초조,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혼재 상태가 잦다. 셋째, 계절이나 스트레스 인자에 따라 급격히 기분이 바뀌고, 대인관계가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친다. 넷째, 반복적인 우울 삽화가 있는데도 항우울제에 잘 반응하지 않거나 오히려 들뜬 기분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치료는 “우울하니 항우울제”라는 단선적 공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급성 조증-경조증에는 리튬, 발프로산, 일부 비정형 항정신병제가 1차 선택이다. 우울 삽화에는 퀘티아핀, 라모트리진, 리튬 등이 효과적이며, 항우울제 단독 투여는 가급적 피한다. 증상이 가볍고 만성적일 때는 저용량 리튬이나 라모트리진 유지요법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생활리듬을 규칙적으로 맞추는 ‘사회적-생물학적 주기 치료(IPSRT)’, 가족교육, 인지행동치료 등이 재발 예방에 핵심이다.

자가 진단은 어디까지나 “경보 장치” 역할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도구는 13개 문항으로 구성된 ‘MDQ’(Mood Disorder Questionnaire)로, 과거 경조증적 행동과 기능 저하 여부를 묻는다. ‘HCL-32’와 ‘BSDS’도 스펙트럼을 포착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설문 점수가 높다고 해서 곧바로 양극성장애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설문지는 “전문의 상담을 받아보라”는 신호로만 활용해야 한다.

결국 양극성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은 우울증과 조증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변주(變奏)를 놓치지 않기 위한 확대경이다. 반복되는 우울과 짧은 기분 상승, 혼재된 불안·충동성이 이어진다면 단순 우울증보다 넓은 스펙트럼에 위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기 진단과 맞춤형 정신약물이 반드시 필요하며 부가적으로 규칙적인 생활리듬 관리가 예후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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