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지 않고 피곤하기만 한데 과식하고 과수면하는 우울증

“우울증” 하면 흔히 식욕이 줄고 잠이 오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 양상을 보이는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바로 ‘비정형우울증’(atypical depression)입니다. 이름 때문에 희귀 질환처럼 들리지만, 진료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자주 만나는 임상 유형입니다.

비정형우울증의 첫 번째 특징은 ‘기분 반응성’입니다. 우울감이 짙더라도 반가운 소식이나 위로를 받으면 한동안 기분이 실제로 올라갑니다. 일반적인 주요우울장애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점이 중요한 감별 포인트가 됩니다. 반대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거절당하면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는데, 이를 ‘거절 민감성’이라고 부릅니다. 사소한 비판에도 심하게 상처받아 대인관계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과도한 잠과 식욕’입니다. 밤에 10시간 이상 자도 피곤하고, 달콤하거나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을 찾게 됩니다. 살이 늘고 생활 리듬이 느려지는 경험은 환자가 스스로를 더욱 자책하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납처럼 몸이 무겁다’고 호소하는 ‘납중감(lead-en paralysis)’이 동반되면 일상 기능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진단은 DSM-5에서 주요우울삽화에 ‘비정형 양상(specifier)’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혈액검사나 뇌영상 같은 특수 검사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나 수면무호흡 같은 질환이 비슷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어 기본적인 신체 검사는 필수입니다.

치료는 약물과 심리치료를 병행합니다.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가 1차 약제로 쓰이지만, 식욕 증가·졸림이 심할 때는 노르아드레날린·도파민 계열인 부프로피온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단가아민산화효소 억제제(MAOI)가 효과적이라고 보고되었으나, 식이 제한과 부작용 문제로 현재는 주로 난치성인 경우에만 고려됩니다. 인지행동치료(CBT)는 ‘거절 민감성’과 자기비난을 다루는 데 효과적이며, 규칙적 운동·일광 노출·수면 위생 역시 치료 성과를 높여 줍니다. 약물 반응이 불충분하면 반복적 경두개자기자극(rTMS)이나 정맥 케타민 주입, 드물게 전기경련치료(ECT) 같은 생물학적 치료 옵션을 추가로 검토합니다.

자가 점검은 간단합니다. “최근 한 달간 사소한 일에도 기분이 쉽게 들뜨고 가라앉았는가?”, “평소보다 과식하거나 달콤한 음식이 끌리는가?”, “밤마다 9시간 이상 자도 낮에 졸린가?”, “몸이 납처럼 무겁고 움직이기 힘든 날이 많았는가?”, “거절이나 비판에 과도하게 예민하게 반응했는가?” 다섯 질문 중 세 가지 이상이 해당된다면 전문가와 상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정형우울증은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 수면-각성 리듬이 복합적으로 어긋나 나타나는 생물-심리-사회적 질환입니다. 증상이 지속될수록 대사증후군, 만성 피로, 대인관계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조기 진단과 맞춤 치료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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